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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作者:滬江韓語

随着南韓3月的到來,曾經在過去為南韓獨立運動奮戰過的那些人再次被人們所記起,所提及。下面我們就通過一些南韓電影作品再次來走近那個時候和那些人吧。

“육혈포를 꽉 잡은 채” 자결한 김상옥 열사×<밀정>

“緊緊抓住六發式左輪手槍”自盡的金相玉烈士X《密探》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그야말로 계급과 지역과 성별을 초월한 범국민적 독립운동으로 왕권 대신 민권을 중심에 둔 국가관을 갖는 계기가 된,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큰 사건이다. 3・1운동을 통해 민족적 자각과 단결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 속속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김상옥 열사도 그중 한 명이다.

1919年發生的3・1運動是超越了階級,地域和性别的泛國民的獨立運動,成為以民權代替王權的國家觀出現的契機,這是南韓民族曆史上的大事件。通過3・1運動,産生了民族覺悟和團結的意義的人們接連投身到獨立運動之中,金相玉烈士也是其中之一。

영화 <밀정>의 도입부에서 독립운동가 김장옥(박희순 분)은 군자금을 마련하려다가 친일 부호가 쳐 놓은 함정에 빠지고, 일경과 극한 대치 끝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군자금 마련 부분은 실제 사건과 다르지만, 김장옥이 일제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은 김상옥 열사의 최후와 유사하다.

電影《密探》的導入部分中,獨立運動家金章玉(樸熙順)在籌集軍費的時候掉入了親日富豪的陷阱之中,在和日本警察極限對峙後選擇了自盡。雖然籌集軍資部分和實際事件有所不同,但是金章玉和日本帝國主義激烈地戰鬥到最後一刻,壯烈犧牲的這一點和金相玉烈士的最後一程是相似的。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그는 1920년 서울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사상을 계몽・고취하는 한편 일제 주요 인사의 암살을 기도했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총독 암살을 계획했는데, 일경에게 동지들이 발각되자 국외에서 힘을 기르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때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열단에도 참가했다.

他是1920年在首爾組織秘密團體——革新團,啟蒙和鼓吹獨立思想的人,另一方面也企圖暗殺日本帝國主義的主要人士。一開始他在南韓企劃暗殺總督,但是同志被日本警察發現,為了從國外培養勢力,他亡命到上海尋找大韓民國臨時政府。并且在此時參加了以金元鳳為中心結成的義烈團。

김상옥은 군자금을 모으다가 1923년에 다시 총독 암살 계획을 실행하려고 무기를 마련해 국내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파악한 상하이 주재 일경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해, 총독 암살이 어려워졌다. 결국 김상옥은 계획을 바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대표적인 독립운동 탄압 기관이었다. 폭탄을 맞은 종로경찰서는 아비규환이 되고, 거사를 치른 김상옥은 일경에 신분이 드러나 쫓기는 신세가 된다.

金相玉籌集軍費,1923年為了再次施行暗殺總督的計劃籌集了武器,回到了南韓國内。然而,由于掌握了他的行蹤的駐上海日本警察的通報,日本帝國主義強化了警戒,暗殺總督變得艱難了。結果,金相玉改變了計劃,鐘路警察廳投了炸彈。當時鐘路警察廳是代表性的鎮壓獨立運動的機關。被炸彈投中的鐘路警察廳成了阿鼻地獄。舉事成功的金相玉的身份被日本警察發現,成為被追捕的對象。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밀정〉에서 양손에 권총을 든 김장옥이 지붕을 넘나들며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 김상옥의 도피 과정이 그랬다고 한다. 그는 도피하면서도 시가전을 치르고 주요 일경을 사살하기도 했다. 일경이 그를 잡기 위해 1000여 명이나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신출귀몰했어도 혼자 1000명을 상대하기란 중과부적이었다. 영화 속 김장옥처럼 김상옥은 마지막 탄환 한 발을 자기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자결, 순국했다. 그때 그는 서른네 살이었다.

在《密探》中有一個場景是雙手拿着手槍的金章玉在屋頂之間往來,展開槍戰的場景,據說金相玉實際上就是這麼逃跑的。他一邊逃跑一邊展開巷戰,還射殺了主要的日本警察。日本警察為了抓住他甚至還動員了1000多人。但是,不管他再是如何神出鬼沒,寡不敵衆的他一人還是難以對抗得了1000人的。跟電影中的金章玉一樣,金相玉将最後一顆子彈對準了自己的胸口,靠着牆壁大喊:“大韓獨立萬歲”後自盡殉國。那時候他是34歲。

불굴의 독립운동가, 비운의 삶 김시현 ×<밀정>

不屈的獨立運動家,悲慘的人生金始顯 X《密探》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밀정>에서 이정출과 함께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우진(공유 분)의 모델이 된 김시현은 안동 출신으로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그도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의열단에 들어가 무장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출소 뒤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섰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생도를 모집할 때 북경 지역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때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가 1기생으로 입교하기도 했다.

金始顯就是《密探》中和李禎出一起為了往南韓國内送武器而東奔西走的金裕振(孔劉)的原型,他是安東出身,明治大學法學部畢業的知識分子。他也是在3・1運動後去了滿洲,正式開始投身獨立運動。他加入義烈團走上了武裝鬥争之路,作為“黃玉警部炸彈事件”的主謀者被逮捕,被宣判有期徒刑10年,在監獄中服役。出監獄後他再次前往中國,投身獨立運動,在招募北韓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的學生的時候成了北京地區的負責人,此時,民族詩人李陸史也作為第一期學生入校了。

김시현은 불굴의 독립운동가다. 독립운동 혐의로 여섯 번 체포되고 19년간 복역하면서도 결코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金始顯是一位不屈的獨立運動家。他因為涉嫌進行獨立運動而6次被逮捕,就算服役19年,他也絕不停止獨立運動。

1945년 광복 후 귀국한 김시현은 해방 정국 초기에 귀환 동포와 국외 동포를 돕고 보살피면서 해방된 새 나라에 대한 기대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한반도의 분단이 확 실해지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치에 나섰고, 1950년 안동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 국회는 1주일밖에 열리지 못했고, 그의 의정 활동도 여기서 그친다.

1954年光複回國的金始顯在解放政局初期一邊幫助和照顧歸國同胞和海外同胞,一邊想要實作對解放的新國家的期待。然而随着被夾在美國和蘇聯之間的韓半島争端變得嚴重後,為了改變這種情況,他投身政界,1950年在安東被選為了第2代國會議員。但是随着南韓戰争(抗美援朝)的爆發,這屆國會隻開了一個星期而已,他的議政生涯也就此結束。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1952년, 김시현은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함께 한 유시태(柳時台, 1890~1965)와 돌연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암살에 나섰다가 총알이 불발해 실패했다. 이승만이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국민을 위하기는커녕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민간인을 학살하고 독재를 공고히 한다고 본 김시현은 그를 제거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방아쇠는 유시태가 당겼지만, 그 배후에는 김시현이 있었다. 당시 유시태는 62세, 김시현은 69세였다. 이 사건으로 김시현은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데, 8년 넘게 수형 생활을 한 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

김시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불굴의 삶이었다. 그는 한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몸을 던졌으나, 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로 남아 있다.

1952年,金始顯作為義烈團團員和一起進行過獨立運動的柳時台突然去暗殺總統李承晚,卻因為手槍啞火而失敗。金始顯看到李承晚看到因為戰争深陷水深火熱的國民不僅沒有作為,甚至還樹立起反共的旗幟殺害民間人,鞏固獨裁,是以認為除掉他是為國為民的事情。雖然扳機是柳時台扳動的,但是背後主導的是金始顯。當時柳時台62歲,金始顯69歲。因為這一事件,金始顯被宣判死刑,之後被減刑為無期徒刑,在監獄中服役8年多後,他在1960年因為4・19革命被釋放。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

無政府主義者樸烈和金子文子 X《樸烈》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박열의 집안은 경상도 문경에서 대대로 글을 읽는 선비 가문이었는데,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제 자본가들이 문경을 광산으로 개발하는 과정에 몰락했다.

樸烈的家門曾是慶尚道聞慶世代讀書的書生家門,在得到總督府支援的日本帝國主義資本家将聞慶當成礦山開發的過程中沒落。

1919년 10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가난한 유학 생활을 하던 박열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 영향을 받는다.

1919年10月前往日本東京,過着艱難的留學生活的樸烈和日本的無政府主義者們交流,思想被他們所影響。

박열은 16세 무렵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는데, 이 학교는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경성고보 시절 일어난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박열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려 했다. 민족적 거사에 공명한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만세 시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3・1운동의 열기가 잦아들자, 박열은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1919년 10월에 적의 심장인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고학을 시작한 박열은 영화 <박열>에서처럼 인력거꾼부터 날품팔이, 인삼 행상 등 갖가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 영어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

樸烈在16歲的時候轉校到首爾的京城高等普通學校,這學校就是現在京畿高等學校的前身。在京城高等普通學校上學時期發生了 3・1運動,他積極投身其中,并緻力于将之擴散到全國。對民族大事産生共鳴的他放棄了學業,回到了故鄉,和朋友門接着進行萬歲示威。然而在日本帝國主義的殘酷鎮壓下, 3・1運動的熱度減退,樸烈為了繼續獨立運動,在1919年10月前往了敵人的心髒—日本東京。在那裡開始勤工儉學的樸烈就像電影《樸烈》中一樣,從人力車夫到打散工,當人參流動商販等,一邊打苦工一邊上英語學校。并且和日本的無政府主義者交流接受了無政府主義的洗禮。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박열이 고향에서 3・1운동을 이어 가던 시기에 가네코 후미코도 한국에 있었다. 박열과는 다소 다른 처지에서 있었지만 그녀 또한 3・1운동에 무한히 감격하고 한국인의 마음에 감응했다. 박열보다 한 살 어린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는 다른 의미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핍박당한 일본의 빈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텅스텐 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다 그 지역의 아가씨와 눈이 맞아 도망친 뒤 가네코 후미코를 낳았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출생신고도 없이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도시 빈민으로서 각자 살기에도 힘겹던 부모가 일찌감치 헤어져 가네코 후미코를 서로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樸烈在家鄉繼續着3・1運動的時候,金子文子也在南韓。雖然他和樸烈的處境多少有些不同,但是她對3・1運動無限感概,對南韓人的心情也十分有感觸。比樸烈小1歲的金子文子和樸烈不同,她是被日本帝國主義和資本主義壓迫的日本貧民。她的父親是在鎢礦礦山工作的礦夫,和當地的富家小姐看對了眼後一起逃跑,之後生下了金子文子。然而,金子文子連出生登記都沒有就被父母抛棄了。作為都市貧民就連各自生活都很艱難的父母一早分開了,他們都不想負責金子文子的生活。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스트 가 운영한 ‘오뎅집’에서 일하며 일본과 한국의 아나키스 트들과 교류하다 박열을 알게 된다.

一邊勞動一邊兼顧學業的金子文子在無政府主義者開的魚糕店中工作,和日本,南韓的無政府主義者交流,然後認識了樸烈。

受南韓3.1運動影響投身獨立運動的曆史人物

가네코 후미코는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자라다가, 결국 청주에 있던 고모 집에 맡겼고 당시 고모와 함께 살던 친할머니로부터 심하게 구박받았다. 친할머니는 그녀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노동과 구박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한 그녀를 측은하게 여긴 이들은 한동네의 한국인들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3・1운동을 목도하면서, 핍박받는 한국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하고 그들의 항거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金子文子輾轉于親戚家長大,結果被托付給了在青州的姑母,當時被和姑母一起生活的奶奶虐待。奶奶并不承認她是自己的孫女。對小小年紀就承擔着難以承受的勞動和虐待,就連自殺都想過的她保有恻隐之心的人就是同村的南韓人。金子文子目睹了 3・1運動,對被壓迫的南韓人的心情産生了共鳴,她從他們的反抗中看到了自己。

박열과 마찬가지로 1919년에 일본으로 간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운명을 더는 친척에게 맡기지 않고 홀로 도쿄에 정착했다. 그리고 박열처럼 일하면서 영어 학교에서 고학하였다. 아나키스트였던 이와사키(岩崎)가 운영하는 ‘오뎅집’에서 일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운명과도 같이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접한다.

和樸烈一樣,在1919年到日本去的金子文子不再将自己的命運托付給親戚,而是獨自在東京定居了下來。她像樸烈一樣工作,在英語學校裡苦學。在曾是無政府主義者的岩崎開的魚糕店裡工作,和日本,南韓的無政府主義者們交流。并且,就像電影中展示的一樣,如同命中注定般地接觸到了樸烈的詩《我是狗崽子》。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열정과 결기에 반해 1922년부터 그와 동지적 우애와 남녀의 사랑으로 뭉쳐 함께 살게 된다.

金子文子被樸烈的熱曲和節氣所感,在1922年開始就因為同志間的友愛和男女之愛而在一起生活。